주요사항
-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함
- 사찰 관련 내용은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내 『용궁사지(龍宮寺址)』에 수록
-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양실의 후원을 받아 중창됨
- 대원군이 구담사(龜潭寺)에서 용궁사(龍宮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함
- 경내에 옥석(玉石)으로 조각된 관음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함
- 경내에 수령 1300년 된 할아버지, 할머니 느티나무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용궁사 수월관음도(龍宮寺 水月觀音圖)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
- 돌부처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
영종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운산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직할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원효가 창건하면서 산 이름을 백운산, 절 이름을 백운사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사찰과 관련된 문헌은 1932년에 김정섭 주지 스님이 발문한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내에 『용궁사지(龍宮寺址)』가 수록되어 있다. 사찰 경내에는 조선 후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성보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용궁사 중창에 관해서는 『용궁사지(龍宮寺誌)』에 “갑자년(1864)에 대원군이 이 사찰을 옛 터로 옮겨 세우고 구담사(龜潭寺)에서 용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고종 원년인 1864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주도하여 사찰을 이전하고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에서는 “1857년부터 1863년 12월 사이에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양실의 후원을 받아 중창되었으며, 그 후 1880년대 관음전을 중건하고, 보살상과 수월관음도를 봉안하였고, 20세기 초반 ‘용궁사’로 사찰 이름이 바뀌었으며, 1914년에 서울에 거주하는 시주자들의 후원을 받아 전각을 중수하면서 법당 내 감실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용궁사에는 대웅보전과, 그 옆 1966년에 건립된 용왕각(龍王閣), 19세기 후반에 중건된 대방(大房)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로 관음전(觀音殿), 1944년에 지어진 칠성각(七星閣), 요사채(寮舍), 그리고 11m의 미륵불이 세워져 있다.
관음전과 유물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다. 측면에는 비와 바람막이용 풍판(風板)이 달려 있고, 정면 가운데 칸이 양 옆 칸보다 두 배 정도 넓은 것이 특징이다.
안에는 본래 옥석(玉石)으로 조각된 관음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하였고 현재는 고풍스러운 후불탱화와 함께 새로 조성된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에는 근대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주련(柱聯)이 걸려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廣大願靈恒不盡 泛洋興香難際際
부처님의 몸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니
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은 한 몸이네.
크나큰 원력은 구름같이 항상 다함이 없어
넓디 넓은 깨달음의 세계 어둡하여 끝이 없네.
또한 관음보살도에는 **1880년 구담사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고,
1916년에는 시주자 **이용선(李用善)**에 의해 감실이 만들어졌으며,
1922년에는 『용궁사관음상봉안감실화기(龍宮寺觀音像奉安龕室畵記)』가 제작되어 연혁이 정리되었다.
이후 1927년에는 김제연(金濟淵)의 시주로 기념비도 세워졌다.
대방과 상량문
용궁사의 대방(大房)은 염불과 참선을 위한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정면 13.14m, 측면 5.90m의 맞배지붕 홑처마 건물이다. 내부에는 1854년 갑인년 정월 흥선대원군이 쓴 ‘용궁사’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백운산 구담사지주 김이환 발문』이 걸려 있으며,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1808–1890)**와 혜민 김씨 등 왕실 및 상궁 18명이 시주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시주자 총 43명 중 27명이 왕실 관련자임을 통해, 사찰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1년 중수 및 상량문
1991년 대대적인 중수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요사채에서 건륭 36년(1771년)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乾隆三十六年孟夏四月十一日上梁
兩替郡水柳耆華仕郞監造道英別差信白僧將海性供養檀
郡太施主同知李白洞洞郞提手魯瑞華
副還手金光洞張厚萬眞舍金時同助役金〇〇
문화재 지정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 (1990년 11월 지정)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9호 (1300년 된 느티나무)
- 유형문화재 제76호 (수목일람표)
용궁사 설화 요약
영종도에는 경치 좋은 백운산 밑에 옛날부터 용궁사라는 절이 있다. 용궁사에는 절을 지켜주는 돌부처가 하나 있었다. 그 돌부처의 유래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씨라는 어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비록 살림은 궁핍했으나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어부들과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어선 하나로 고기를 잡으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고기잡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해 음력 사월이 되었다.
음력 사월이 되면 어부들은 모두 연평도로 조기를 잡으러 가게 되는데 손씨도 남들과 같이 출어를 한 것이다. 마침 조기가 많이 몰릴 때라 여기저기 그물을 친 뒤 한참 후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기대에 부풀어 손씨는 그물을 열심히 끌어올렸다.
그물이 어지 묵직한 것이 아니어서 손씨는 조기가 많이 잡힌 줄 알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끌어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물 속에 고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팔뚝만 한 돌부처가 하나 들어 있는 것이었다. 손씨가 돌부처를 살펴보니 바다 속에 오래 있었던지 물이끼가 잔뜩 낀 것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였다.
손씨는 투덜대며 돌부처를 도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른 어부들이 고기를 많이 잡아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손씨는 다시 그물을 치고는 끌어올렸다. 그런데 역시 고기는 보이지 않고 아까 버렸던 돌부처만 덜렁 들어있는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손씨는 투덜거리며 다시 돌부처를 바다 속에 던져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백발이 성성한 도사가 나타나 손씨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바다에서 건져 낸 돌부처는 본디 백운산 밑 용궁사에 있어야 할 부처이니라. 내일 네가 고기를 잡으러 가면 그 돌부처를 다시 전진(前陳)하이, 영종진 태평암 위에 잘 모셔라.”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손씨는 날이 새자마자 바다에 나가 그물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물 속에는 그 도사의 말대로 또 돌부처가 들어 있었다.
어느는 꿈에서 본 도사의 말대로 돌부처를 태평암 위에 모셨다.
그 태평암 주변에는 활쏘기로 세월을 보내는 한량들이 있었다.
한 한량이 태평암 위에 부처가 있는 것을 보고 장난삼아 활을 쐈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부처의 오른 팔에 부딪히자 돌부처의 입이 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팔이 다시 제자리에 붙으면서 그 순간 부처를 향해 활을 쏘았던 한량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이후 돌부처를 안치했던 손씨는 고기를 많이 잡아 잘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부처의 소문이 퍼지자 백운산 밑에 있는 용궁사의 스님이 찾아와 이 부처를 용궁사에 모셔놓았다.
돌부처를 용궁사에 모신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곳을 지나가며 소나 말을 탄 사람은 내려서 걸어가야 했으며 담뱃대를 입에 물고 갈 수 없었다.
소나 말을 탄 채 용궁사를 지나가면 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담뱃대를 물고 가던 사람은 담뱃대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돌부처에게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이 절을 지켜주던 돌부처는 일제 강점기 때 약탈 당했지만 용궁사는 지금도 영종도에 유서 깊은 절로 남아 있다.
📖 출처 : 중구 역사문화 관광해설 교재
